마케터로 일한 지 1년 정도 됐을 때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울어봤다.
뭔가를 할 때 ‘영 못하겠다’ 라고 생각한 적은 살면서 거의 없었는데, 그 막막한 감정을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제대로 느꼈다. 제일 막막했던 점은 마케팅은 그냥 노력만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나 마케팅이 적성이 아니었나봐ㅠㅠ 망했어”

고객과 구매여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또는 인지하지 못하는) 니즈를 찾아서, 자연스럽지만 반짝이는 크리에이티브가 담긴 멘트로 공감과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 그게 당시 내가 생각하던 마케팅이었다. 얼마나 멋있고 매력적인지. 드라마 주인공들도 보면 그래서 보통 마케팅팀이었던 것 같다. 나도 그런 드라마 같은,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면 그런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도 나름 센스있고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그랬는데(…)

그게 현실에서 내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역시 쉽지 않았고, 멋진 일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멋 없고 재미 없고 노가다스러운 일도 많았고, 무엇보다 나는 내 생각보다 아이디어 뱅크(=주인공)가 아니었던 탓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크리에이티브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 이라는 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이전에 잘 했어도 다음에도 잘 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열심히 한다고 잘 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거기다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도 굉장히 많았다. 기존에 알았던 것도 트렌드가 지나면 다시 배워야 한다. 근데 마케팅이란 건 정확히 뭐지? 개발, 디자인, 회계, 인사, 영업은 나름 뚜렷한 것 같은데 마케팅은 굉장히 굉장히 추상적인 말이었다. 와, 나는 심지어 마케팅 전공자도 아니다. 1년여가 지난 시점에는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이건 좀.. 내가 앞으로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일단 깨지고 시작하자

“지금 1, 2년 차인데 마케팅에 자신이 없다고?
그럼 잘 하고 있는 거네”

나는 말하기도 힘들었던 고민을 듣고 당시 3~4년차였던 선배가 무던하게 한마디 했었다. 별로 놀라거나 안쓰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나는 지금도 이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솔루션도 아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내 마음은 참 안정됐었다.

나에게 이 말은 두가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 마케터 중에 너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2) 마케팅을 잘 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부딪쳐 환상을 깨는 과정이 한번 쯤은 필요하다.

드라마를 보고 키워온 환상도, 크리에이티브 병도 다 떨치고 정말 실무로서의 마케팅을 직면할 필요가 있었다. 그 후로 내가 정의한 마케팅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일’이었다. 처음에 꿈꿔왔던 마법(?)같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오히려 알 수 있었다.

뜬금없지만 캠핑을 간다고 할 때
노을을 바라보며 모닥불 예쁘게 피워놓고 고구마 구우면서 기타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땅을 고르고 돌멩이를 치우고 흙바닭 만지면서 못 땅땅 박고 줄 땡기고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전에는 텐트도 사야 하고, 가격 비교하고 할인 쿠폰도 받아야 하고. 저기 끝 단에 있는 아름다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밑작업을 당황하지 않고 슥슥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에게는 마케터가 되는 일이었다.

지금 나는 7년차 마케터이다.
마케팅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겁 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전보다 익숙하고 여유롭게 대처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부터 자주자주 포스팅으로 남겨보려 한다. 혹시 마케팅을 하며 6년 전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 고민 잘 하고 있는 거라고! 오히려 빨리 더 많이 할 수록 좋을 거라고.